주말엔 숲으로
처음에 온 책에 같이 따라온 카드툰의 그림을 먼저 보았다. 그림이라고 해봐야 내가 좋아하는 강풀의 그림처럼 완전 사실적인 그림도 아니고 그냥 사람임을 알아볼수 있는 그런 그림. 사실 처음 봤을땐 나도 이 정도는 그릴수 있겠다하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의 단순한 선들로 이루어진 그림이었다. 그렇지만 그 여리디 여린 선 하나가 모이고 모여서 그림을 만들어 내고 또한 그 내용이 완전 공감이 되니 어찌 이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책들에도 각기 다른 여자들이 등장해서 공감대를 형성해 내지만 이 책에서는 조금은 공감대 형성은 덜한 편이었다. 각기 다른 세명의 친구들. 개성도 뚜렷하고 하는 일도 다 다르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다 전문직이다. 나는 친구도 그리 많은 편이 아니거니와 전문직이라 할만큼 멋진 지위에 있는 친구들도 없다. 그저 다들 평범한 한 개인일뿐. 그래서 공감을 하기보다는 위화감이 들긴 했지만 읽으면서 이런 곳에 있는 친구가 있었음 하고 약간의 바램은 가질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 느낌으로 읽었다. 나도 번역가인 시골에 살고 있는 친구가 있었음 하고 말이다.
주인공인 세명의 여자. 그중 시골에 사는 번역가. 그리고 도시에서 회사를 다니는 두명의 친구. 한명은 여행사에서 근무를 한다. 예전에 내 친구 중에서 여행사에서 일하던 친구가 있어서 대충 안다. 사람들 한명한명 다 비위를 맞춰줘야 하고 틈틈히 티켓팅도 해야하고 윗 사람들의 눈치도 보아야 하는 아주 힘든 직업중의 하나라고 하던 그녀가 생각났다. 그리고 경리를 보는 다른 친구. 사실 숫자 감각은 없는 편이라 경리가 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단지 예전에 아빠가 회사를 경영하시던 무렵에 경리를 보던 언니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돈과 관련된 직업이리라 생각이 든다. 아마도 모든 회사의 회계를 관리하는 직업일테고 역시 머리 아픈 직업임에 틀림없다.
그녀들은 경품에 차가 당첨되고 도시에서는 돈이 많이 드는 주차장을 피해 아예 시골로 이사를 가버린 친구 집에 교대로 들른다. 시골이라 해도 완전한 귀농이 아니어서 그녀는 싱싱한 야채도 택배로 시키고 또한 친구들이 가지고 오는 도시의 문명들을 즐기며 근처의 숲들을 산책하기도 하는 그러한 자유의 시간을 보낸다. 가끔씩 오던 친구들은 이곳에 올때마다 무언가를 배우고 간다. 자연에서 배우는 것도 있고 친구의 말을 통해서 배우는 것도 있다. 그때 당시에는 그런가보다 하고 잊었던 일들이 도시에 가면 어떤 상황에서 특히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는 상황에서 딱 그때 장면에 떠올라지면서 모든 일들이 원만하게 된다는 것인데 약간은 교훈적이라 할수도 있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생활에 지친 모든 일하는 여성들이여. 비록 우리가 숲에 살고 있는 친구가 없어서 주말마다 둘 또는 셋이 모여서 산책을 가고 카누를 탈수는 없지만 이 책 한권으로 교훈을 얻어서 잠시나마 세상의 근심에서 짜증에서 벗어 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기분 좋은 일이 아닌가.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오랜만이다. 장르소설이 아닌 보통의 일반소설이 두꺼운 책을 읽는 것은. 더군다나 프랑스 작가의 작품으로 장르소설이 아닌 책을 읽기가 오랜만이다. 요즘 프랑스 작가들도 스릴러 소설에 강세를 보이고 있어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래서 더욱 다른 장르에도 약간은 눈길이 갔지만 솔직히 말해서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책을 읽었다면 아마도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책표지를 보고서 소설인 것을 알았다. 뒷표지를 보고서는 자전적인 소설이라는 것을 알았다. 책을 펼쳐서 보면 일인칭시점으로 나열되고 있어서 저자와 주인공을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어떤 책이던 간에 일인칭시점으로 나열되다보면 저자와 주인공을 동일시하게 생각이 되어진다. 몇권의 책도 그렇게 본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책에서는 제일 처음에 주인공의 이름과 저자의 이름이 같지만 전혀 별개의 다른 만들어진 화자라는 설명을 덧붙여 놓고 있긴했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간혹 가다가 픽션을 더하고 싶었지만 더할수 없었다.. 라는 표현을 쓴것으로 봐서 정말로 있었던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지기도 한다. 소설이라는 말로 보아서 전혀 사실적인 일은 아닐텐데 말이다.
겉표지에 보면 손에 담배를 들고 어딘가를 멍하니 보고 있는 전형적인 미인형태의 여자가 있는 사진이 있다. 책을 읽다보면 이 사진이 엄마의 사진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실제로 있는 사실일까 아니면 만들어 낸 이야기일까. 이야기는 처음에 엄마의 죽음으로 시작하고 있다. 물론 그 이야기가 주욱 이어가다 보면 마지막 역시 또한 엄마의 죽음으로 끝나고 있다. 엄마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 그것은 과연 정말로 재미있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부담스러운 이야기일까. 이 이야기가 전체가 다 사실이라면 엄마의 인생은 정말로 파란만장하지 아니하다 할수 없겠다.
엄마는 자살했다. 엄마나이 육십밖에 되지 않았을때 자살을 시도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죽었다. 대체 왜 엄마는 죽음을 선택한 것일까. 엄마의 인생에는 어떠한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을까. 엄마의 이야기를 쓰겠다는 주인공의 시점은 엄마의 어렸을 때 즉 자신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가정을 꾸리게 되었고 그 가정에서 엄마인 뤼실의 존재는 어떠했다는 이야기들이 계속된다. 아이가 많은 것을 원했던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이들을 많이 데리고 있었고 그 아이들을 다 관리하지 못해서 어느날 여름 한 아이가 사고로 죽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 또 다른 아이 하나를 입양하게 된다.
엄마는 어렸을때 아주 이쁜 아이였다. 수많은 광고를 찍었고 광고 회사에서 어서 오라고 하는 그런 존재였다. 그런 엄마는 커가면서 자신감을 잃었고 결국 결혼하기에는 이른 나이에 아이를 가지게 되고 그럼으로 인해서 결혼을 하게 된다. 그 아이가 바로 나인 것이다. 엄마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나는 많은 조사를 하게 된다. 엄마의 이야기들을 모으고 이모와 삼촌들의 이야기를 인터뷰 하고 그러면서 엄마의 새로운 면을 보게 되기도 한다. 엄마의 식구들 중에서 자살한 사람도 몇명 있고 그것이 여파가 되어서 엄마가 죽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살이라는 것은 자체가 전염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유명한 사람이 죽으면 따라 죽는 그런 신드롬이 있기도 하지만 가족 중에서 그 사건은 더 큰 여파를 남긴다. 가족중에 자살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더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엄마, 어머니,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자료 조사같은 것으로 다 파악할수 있을까. 사진 한장으로 엄마를 파악한다는 것은 얼마만큼 엄마를 이해할수 있을까. 비단 엄마가 아니라 하더라도 한사람의 인생을 다 알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겉으로 드러난 것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속까지 이해한다는 것은 더 어려운일일 것이다. 하물며 그 당사자가 없는 지금 시점에서는 더 할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 할머니 뿐 아니라 모든 가족들을 이름으로 표기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헷갈렸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이름에 익숙해지고 나니 읽는데는 그리 어려움이 없었다. 딸인 나의 입장에서 보는 엄마의 이야기. 내가 엄마의 이야기를 쓴다면 이만큼 많은 일들은 없겠지만 과연 나는 어떤 엄마의 입장을 볼수 있을 것인가...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제목이 정말 마음에 들었던 책. 내가 정말 원하는 것. 그런 건 아무리 책을 찾아봐도 나오지 않는다. 어떤 자기계발서를 찾아본다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딱 꼬집어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건 결국 내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닐까 하면서도 쉽게 마음이 정해지지 않는다. 박완서님의 첵제목에도 있다. 못가본길이 더 아름답다. 내가 가지 못한 길이기에 그 길이 더 좋아보이는 것은 아닌지 그 길이 더 멋있어 보이는 건 아닐지 고민해볼 일이다. 인생이 한번밖에 없기에 그 고민은 좀더 신중해 지고 그럼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정말 자신이 원하는 걸 곰곰히 생각하고 따져보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주말엔 숲으로' 라는 책을 통해서 작가를 알게 되었다. 그저 펜 하나로 슥싹 그려 낸 듯한 그런 그림인데도 불구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들어 있다. 배경에 톤이나 명암이나 그런 것 하나 없이 텅 비어 있는 데도 불구하고 배경이 꽉 찬 느낌이 든다. 오히려 여백의 미랄까. 그럼으로 인해서 책장 하나 또는 옷장 하나가 배경에 그려져 있으면 무언가 확 달라진듯한 느낌이 들고 반갑다. 그리고 처음에는 몰랐는데 같은 책을 두번 세번 보다 보니 주인공들의 표정이 하나하나 굉장히 세밀했다. 특히 이 책에는 꼬맹이가 주인공에 포함되어 있어서 더 자세히 보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전 책에서는 세친구의 이야기가 그려졌다면 같은 여자 세명이긴 하지만 이 책에서는 꼬맹이가 한명 나온다. 그래서 더 자세히 들여다본 그 꼬맹이의 얼굴은 시무룩할때의 표정과 자신이 기쁠때의 표정이 단 하나의 선인데도 불구하고 확연히 차이가 드러나 있다. 그런 소소한 즐거움을 찾으면서 처음에는 글을 보게 되고 두번째는 그림을 보게 되었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 그런 딸을 둔 엄마. 그리고 그 딸을 조카로 삼고 있는 고모. 이 세명의 여자가 이 책에서는 주인공이다. 꼬맹이의 입장에서는 보는 전업주부인 엄마와 일을 하고 있는 고모. 자신도 여자이니 어떠한 삶을 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의 이 꼬맹이는 나이답지 않게 여러 세상살이를 잘 알고 판단해준다. 전책에서 숲에서 살고 있는 번역가 친구의 몫을 하고 있는달까. 같은 동성이라서일지는 몰라도 고모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꼬맹이한테 해주고 그 영특한 꼬맹이는 귀담아 잘 들어둔다.
나도 조카가 있고 고모라는 타이틀이 있지만 이 책에서의 꼬맹이만큼 울 조카는 따라가지 못한다. 남자조카라서 그럴까. 책에서는 유치원생이고 울 조카는 초등학교2학년일지라도 다르다. 그냥 책에 있는 캐릭터와 살아있는 현실의 사람을 비교해서 그런가. 이 책에 나오는 꼬맹이가 울 조카라면 나도 책속의 고모처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겠지만 울 조카는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쁜 나이이고 고모가 오면 무조건 놀아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지극히 평범한 남자아이라 나도 여자조카가 있었음 하고 바라게 되는 맘이 책 덕분에 한번 또 들게 되었다.
전업주부인 엄마는 일을 하고 싶어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고 싶어한다. 일을 해야만 하는 고모는 자신이 언제까지 일을 해야 할지 자신의 미래를 보장받고 싶어한다. 나는 고모의 입장에 서있다. 일을 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일을 할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나중에 돌봐줄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모는 나이가 들어서까지 영원히 함께할수는 없을테고. 그래서 더욱 고모의 입장에서 절실하게 느껴졌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뭘까. 아직도 이 나이에도 나는 여전히 방황중이다. 이 미션카드에 적힌 69라는 숫자. 내가 저 나이가 되면 내가 정말 뭘 하고 싶을지 생각이 날까.